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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자인과 농학이 만나는 치유의 기록
About 초아블룸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정원에서 배웠습니다

by ChoaBloom 2026. 7. 13.

십 년 전,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정원을 가꾸겠다는 대단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봄이 오면 꽃 화분 하나를 사서 마당 한쪽에 심는 정도. 그게 전부였습니다.

 

식물은 그저 배경이었어요. 제 삶의 중심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요.

이사 온 첫해에 심은 남천나무 아래 누워 올려다본 하늘

마음 둘 곳이 필요했던 시간

몇 해 전, 오래 다니던 회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떠나는 과정은 길지 않았고, 준비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어요. 오래 몸담았던 곳에서 더 이상 자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제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그곳에 두고 살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시간도, 밤도, 마음도.

 

그런데 그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남은 게 없었어요.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제 뭘 하지'가 아니라 '나는 누구지'였습니다.

 

그때 마당에 나갔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집에 있기가 답답해서, 그냥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거기 초록이 있었어요.

 

제가 신경 쓰지 않는 동안에도 자라 있었고, 제가 무너지는 동안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잎을 내고 있었어요.

처음엔 그게 조금 야속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멀쩡하구나, 싶어서요.

그런데 매일 나가다 보니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완벽한 잎은 하나도 없었어요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잎마다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벌레가 먹은 자국이었어요.

줄기는 곧게 자라지 않고 빛을 향해 굽어 있었고, 어떤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한 채 그대로 있었습니다. 시든 꽃도 있었고, 병든 잎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그 정원은 살아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 흠집들이 있어서 살아 있는 거였어요. 벌레가 먹었다는 건 누군가 거기서 살고 있다는 뜻이고, 줄기가 굽었다는 건 빛을 찾아냈다는 뜻이니까요.

완벽한 잎은 아무도 살지 않았다는 뜻이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자연은 저를 재촉하지 않았어요

제가 있던 세계는 늘 빨랐습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잘. 성과가 없으면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했고, 증명하지 못하면 밀려났어요.

 

그런데 정원은 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씨앗을 심고 다음 날 나오라고 재촉할 수 없었어요. 물을 두 배로 준다고 두 배로 자라지 않았고요. 오히려 조급하게 굴수록 식물은 망가졌습니다.

 

기다려야 했어요.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런데 그 무력함이, 이상하게 저를 살렸습니다.

 

감상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원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로 끝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왜 그랬을까. 왜 흙을 만지면 마음이 가라앉을까. 왜 식물 앞에서는 조급함이 사라질까.

이게 그냥 기분 탓인지, 아니면 실제로 무언가가 일어나는 일인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농학을 배우면서 식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게 되었고, 사회복지를 배우면서 사람이 어떻게 회복하는지 알게 되었고, 심리학을 통해 그 둘이 어디서 만나는지 배우고 있습니다.

 

식물이 사람을 치유한다는 말은 감성적 수사가 아니었어요. 근거가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

저는 지금 자연치유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정원만이 아니었어요. 숨도, 흙도, 작물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예에서 멈추지 않고 산림과 농업까지 함께 배우고 있어요.
언젠가는 저처럼 무너졌던 사람들이 자연 앞에서 다시 자기 속도를 찾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요.


빠른 힐링을 약속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건 없으니까요.
대신 자연의 속도를 존중하는 회복을 설계하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정원에서 배운 유일한 방법이거든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저는 다 나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전히 어떤 날은 무겁고, 그럴 땐 마당에 나갑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극복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조심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고는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하게 회복한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회복 중인 사람으로서요.

 

지금 어딘가에서 무너져 있는 분이 계시다면, 꼭 대단한 걸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잎사귀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는 것부터 시작해도 괜찮아요.

자연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니까요.

 

천천히 가도 됩니다.

 

다시 앞을 바라보고 걸은지 1년.
나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록입니다.